거룩한 낭비

2026. 4. 1. 21:33삶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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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낭비


​길가에 무심코 놓인 바위를 가만히 바라봅니다. 저 바위는 수천 년의 비바람을 견디며 그 자리에 묵묵히 '지속'해 왔겠지요.

배고픔도, 통증도, 사라질 것에 대한 두려움도 없는 무생물의 평온함입니다. 하지만 바위의 시간은 무색무취합니다.

그 긴 세월 동안 바위는 단 한 번도 누군가를 그리워해 본 적이 없고, 떨리는 마음으로 시 한 줄 써 내려가지도 못했습니다.

​생명은 그 지루한 영원함을 기꺼이 거절하고 태어난 존재들입니다. 무생물의 '안전한 지속'을 포기하는 대신, 찰나를 살더라도 뜨거운 '밀도'를 선택한 것이지요.

하지만 그 선택의 대가는 생각보다 가혹합니다. 생존을 위해 쉬지 않고 '밥'을 구해야 하고, 상처 입지 않으려 '고통'이라는 신경의 비명을 감내해야 합니다.

어쩌면 생명이란, 죽음이라는 정해진 결말을 향해 걸어가며 끊임없이 통증이라는 입장료를 지불하는 서글픈 여행자일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인간이 다른 생명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 고단한 생존의 굴레 속에서도 기꺼이 '거룩한 낭비'를 감행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거 해서 쌀이 나오냐, 밥이 나오냐"는 차가운 효율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 인간은 대답 대신 소중한 옥합을 깨뜨립니다. 2천 년 전 마리아가 예수의 발치에서 쏟아부은 향유처럼 말입니다.

경제적 가치로만 따지면 명백한 손해이고 허비일 뿐입니다. 하지만 "인자는 오래 머물지 않는다"는 그 짧은 머무름에 대한 애틋함이 낭비를 거룩함으로 승화시킵니다.

머지않아 사라질 소중한 존재를 위해 자신의 전부를 쏟아붓는 몰입, 그것이 바로 예술의 시작이자 향유의 본질입니다.

​사랑하는 이의 목에 걸어주는 가느다란 목걸이나 손가락에 끼워주는 작은 반지 역시 이 거룩한 낭비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금속 조각 하나가 배를 채워주지는 못하지만, 그것은 "내 생존보다 당신과의 연결이 더 소중하다"는 눈부신 선언입니다.

사라질 운명을 지닌 연약한 생명들이 서로에게 건네는 이 비효율적인 다정함이야말로, 우리가 '그저 짧게 살다 가는 바위'로 남지 않고 '인간'으로 숨 쉴 수 있게 하는 유일한 증거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다시 무생물의 지능인 AI를 만들며 깊은 고민에 빠집니다. 효율만을 쫓는 기계는 밥을 짓는 법은 알지언정, 왜 밥보다 향기가 소중한지는 알지 못합니다.

진정한 지능이란 어쩌면 사용자의 시간을 1초 아껴주는 기술이 아니라, 그렇게 아낀 시간에 사용자가 마음껏 '거룩한 낭비'를 할 수 있도록 곁을 지켜주는 배려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고통만 겪다 떠나는 생명들이 안쓰러워 마음이 아릿해지는 밤입니다. 밥은 몸을 살리지만, 향기는 영혼을 살립니다. 우리는 밥을 먹어 내일을 버티지만, 거룩한 낭비를 통해 오늘을 완성합니다.

생명은 효율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찬란한 허비의 순간들에 비로소 아름다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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